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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여름 휴가철이 돌아왔다. 서양에서 휴가를 한달씩 다녀온다는 이야기가 부럽게만 느껴지는 한국인들에게 그래도 대략 한주간의 휴가는,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숨쉴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나 싶다. 때가 때인만큼 이번에는 성경속에서 휴가와 연관된 이야기를 한번 꺼내보고 싶다.

 

1. 쉼은 성경적인 일이다. 번 아웃된 엘리야 이야기.

 

쉼이라는 것이 왠지 죄를 짓는 것인 마냥 생각되는 모양이 기독교 안에 있는 것은 아마도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를 아깝게 생각지 않은 사도들의 모습 때문에 그러한듯 싶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쉰다는 것이 마치 죄악인양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가지는 분들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을 볼 때 쉼이라는 것은 상당히 성경적인 일임을 볼 수 있다. 물론 성경에서 그만큼 게으름에 대해서도 주의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겠다.

 

잠언 6장 6절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이 사는 것을 살펴보고 지혜를 얻어라.

 

엘리야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자.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는 아주 대승을 하게 된다. 바로 바알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엘리야와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은 각자의 신에게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해달라는 대결이었고, 엘리야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며 바알 선지자를 처단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완벽한 승리가 아마도 엘리야에게 번아웃 현상을 가져온듯 싶다. 그렇게 바알선지자와의 대결에서 이기는 것도 모자라 비가 내리도록 기도한 엘리야의 모습만 보면 승승장구하는 모습인데, 그 다음장 19장의 엘리야를 보면 너무나도 무기력한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 왕이었던 아합의 아내 이세벨, 그러니 다시 말하면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기로 다짐을 했고, 엘리야는 너무나도 무기력해서 도망을 치며 죽기를 간구하니 말이다.

 

이전 18장까지만 해도 정말 두려울 것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른바 '불의 사람'처럼 활활타오르던 엘리야가 19장으로 넘어가더니 스스로 죽기를 간구하는 모습을 보면 번아웃되었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열왕기상 19장 4절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은 하나님의 반응은 꾸짖음이 아니었다. 마치 요즘식으로 말하면 "니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무엇하는 것이냐? 썩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져라!"라고 말하며 채찍질로 엘리야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이 아니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럼 어떠셨을까?

 

열왕기상 19장 5절-8절 그런 다음에,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 때에 한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웠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그의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주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도착하였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지쳐 잠이든 엘리야를 채찍질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음식을 주시며 쉼의 시간을 허락하신다. 구운 떡과 물을 주시면서 지친 기력을 회복하게 하시고, 또 잠을 잘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지쳐서 그렇게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결말이 되도록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또 다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일으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연약함도 아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그 안에 하나님은 쉼의 시간을 집어넣으신 것이다.

 

성경을 보면 이 하나님의 쉼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 나타남을 볼 수 있다. 희년이나 안식년이라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일곱번째날의 안식도 그러하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쫓아온 수많은 군중들을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그들이 굶주림으로 지쳐 쓰러질까 염려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기도 하셨다. 또한 밤새 고기잡이를 한 제자들을 위해서 조반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이시기도 했다.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달려온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게으름이라는 것은 허락되지 않지만, 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쉬어야 더 오래 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각자에게 주어진 쉼의 시간을 제대로 누릴 줄 아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할 듯. 누군가가 말했다. "쉼도 사역이다"라고 말이다.

 

 

 

 

2. 휴양지를 향한 권력자의 탐욕과 비극. 나봇의 포도원

 

여름휴가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에 하나가 바로 휴양지이다. 어디에 가서 쉼의 시간을 가질 것인가? 이왕이면 좋은 곳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런 마음이 탐욕이 된 사건이 있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다.

 

왕상21장 1-3절 그 뒤에 이런 일이 있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 땅에 포도원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 포도원은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궁 근처에 있었다.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포도원이 나의 궁 가까이에 있으니, 나에게 넘기도록 하여라. 나는 그것을 정원으로 만들려고 한다. 내가 그것 대신에 더 좋은 포도원을 하나 주겠다. 그대가 원하면, 그 값을 돈으로 계산하여 줄 수도 있다."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였다. "제가 조상의 유산을 임금님께 드리는 일은, 주께서 금하시는 불경한 일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는 이스르엘 평야에 별궁이 있었고, 그는 그 궁 근처에 있는 포도원을 자신의 나물밭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아합은 그 포도원에 자신의 텃밭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자신이 원하는 작물을 재배하며 귀농의 재미를 맛보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아합왕이 왕으로서 진짜 귀농을 할 것은 아니기에 그는 말 그대로 자신의 별궁에서 휴양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낸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나봇은 이것이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땅이기에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으로 그렇게 할수 없다고 거절을 했다. 이스라엘에게는 땅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나누어주신 것이기에(여호수아) 자신의 마음대로 사고파는 모습이 존재할 수 없었고, 결국 나봇은 그것을 근거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에 아합은 한발 물러서게 되었지만, 결국 그 일을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알리게 되고(참 무서운 아내를 둔 아합이라고 하겠다.) 이세벨은 나봇에게 모함을 씌워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땅을 아합에게 바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아합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된다. 아합은 거의 초딩처럼 이불 뒤집어 쓰고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아합의 모습을 꾸짖는다.

 

왕상21장 17-19절 주께서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 곳으로 내려갔다. 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살인을 하고, 또 빼앗기까지 하였느냐? 또 나 주가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 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왜 성경이 아합의 이런 모습을 꾸짖었는가? 직접적으로 아합이 나봇을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권력자의 탐욕이라는 것이 결국 무고한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게 만들었었다. 또한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는 것에 포도원을 적극적으로 취하러가는 모습도 그의 탐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단순히 행동을 했으냐 하지 않았느냐 정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 마음의 문제 또한 지적함이 존재한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이미 간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그러한 부분이다. 현행법상 마음의 죄를 가지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께서는 마음을 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것이 행동으로 한것만큼 큰 죄로 여겨진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3. 성경속 최고의 휴양지는 어디일까?

 

가끔씩 '죽기전에 가봐야 할 휴양지 10'이런 식으로 뉴스기사가 나오곤 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 정말 '아 저기 한번은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세상에는 어쩌면 그리 아름다운 곳들이 많이 있는지,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북한으로 인해 육로는 단절된 우리의 현실에서는 여행이라는 것은 많은 결단을 필요로 해서 그런지 왠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속에서 최고의 휴양지는 어디일까? 아마도 변화산이 아니었을까?

 

마태복음 17장 1-4절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서,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내가 여기에다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에는 주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부분이다. 그런데 변화산에 예수님과 함께 오른 제자들은 천상을 체험하는 그런 경험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까지 직접 들었고, 거기에 천국에서 만나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기도 했으니 말이다. 또한 변화하신 예수님까지...

 

오죽 좋으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겠는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다라고 말이다. 초막을 짓겠다는 이야기는 아에 거주할 생각을 하는 것인데, 베드로만이 아닌 다른 제자들도 동일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흔히 우리는 정말 좋은 곳을 '천국'같다라고 말을 하는데,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지금 천국체험을 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비록 그들이 다시 산을 내려오게 되지만, 어쩌면 제자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휴양지는 이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봐도 성경속에서 천국체험을 한 변화산을 따라갈만한 그런 곳은 없을 듯 하니, 성경속 최고의 휴양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https://story.kakao.com/ch/funbible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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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ands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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